티스토리 뷰
목차
뉴스에서 페스트균 유출 소식을 접한 순간, 저도 모르게 책장 한켠에 꽂아두었던 알베르 카뮈의 『페스트』를 다시 꺼내 들었습니다. 코로나19가 처음 번지던 그 겨울의 공기가 불현듯 되살아났기 때문입니다. 재난 앞에서 어떤 태도를 취하는지가 결국 그 사람의 전부를 드러낸다는 것, 이 소설은 그 사실을 조용하지만 묵직하게 증명합니다.

재난과 인간 — 그 시절 제가 가장 두려웠던 것은 병이 아니었습니다
코로나19가 처음 터졌을 때, 솔직히 이건 예상 밖이었습니다. 마스크가 사라진 편의점 진열대, 엘리베이터 안에서 서로 눈도 마주치지 않으려던 이웃들의 모습. 제 생애에서 그런 광경은 상상조차 해본 적이 없었습니다. 중세의 흑사병(Black Death)이라 불리던 페스트가 21세기에 코로나19라는 이름으로 재현될 줄은 아무도 몰랐겠지요.
여기서 흑사병이란 14세기 유럽 인구의 3분의 1을 앗아간 페스트균 감염병을 가리킵니다. 당시 유럽인들이 경험했던 공포를 카뮈는 1940년대 알제리의 항구도시 오랑을 배경으로 고스란히 재현했습니다. 소설 속에서 의사 베르나르 리외(Bernard Rieux)가 거리 곳곳에서 죽은 쥐를 발견하는 장면부터 시작되는 이 이야기는, 재난의 시작이 언제나 그렇듯 처음에는 '사소한 이상 징후'로 스쳐 지나간다는 점에서 몹시 섬뜩하게 읽혔습니다.
제가 격리 통보를 받았던 2주 동안 가장 저를 짓눌렀던 감정은 사실 두려움보다 죄책감이었습니다. 혹시 제 동선 때문에 누군가의 일상이 무너지지 않았을까 하는 그 생각이, 병 자체보다 훨씬 더 고통스러웠습니다. 오랑 시민들이 봉쇄(quarantine) 이후에 가장 힘들어한 것도 단순한 이동의 제한이 아니라 '내가 누군가에게 위협이 된다'는 감각이었을 것입니다.
카뮈는 『페스트』를 통해 나치즘과 제2차 세계대전이라는 역사적 폭력에 대한 사회적 은유를 그려냈다고 평가받습니다. 전염병처럼 번지는 악(惡) 앞에서 인간은 어떻게 반응하는가. 이 질문은 75년이 지난 지금도 유효합니다
Nobel Prize in Literature 1957
The Nobel Prize in Literature 1957 was awarded to Albert Camus "for his important literary production, which with clear-sighted earnestness illuminates the problems of the human conscience in our times"
www.nobelprize.org
연대의 힘 — 리외, 타루, 그랑이 보여준 것
이 소설에서 저를 가장 오래 붙잡아 둔 질문은 이것입니다. "저라면 남았을까, 떠났을까?" 기자 랑베르(Rambert)는 취재차 오랑에 왔다가 봉쇄에 갇힙니다. 도시 밖에 사랑하는 연인이 기다리고 있고, 그는 이 재난이 자기 일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그 마음, 저는 비난할 수가 없었습니다. 만약 제 아이들이 밖에서 저를 기다리고 있었다면, 저도 가장 먼저 빠져나갈 길부터 찾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랑베르는 결국 남습니다. 리외 역시 치료를 위해 도시 밖에 나간 아내와 생이별한 채로 환자를 돌본다는 사실을 알게 된 후부터입니다. 남의 불행이라 여겼던 것이 어느 순간 자신의 이야기가 되는 그 전환점, 카뮈는 그것을 '연대(solidarité)'라고 불렀습니다. 연대란 단지 함께 고통을 나누는 감정이 아니라, 타인의 현실을 내 책임의 영역으로 당기는 행위입니다.
리외를 도운 인물들을 보면 한 가지 공통점이 있습니다. 이들은 영웅이 아닙니다.
- 베르나르 리외(Bernard Rieux): 개인적 고통을 뒤로 미루고 의사로서의 직업적 사명감을 끝까지 지킨 인물. 거창한 이념보다 눈앞의 환자 한 명을 살리는 데 집중합니다.
- 장 타루(Jean Tarrou): 외부인임에도 자원 보건대(sanitary squad)를 직접 조직해 방역 최전선에 섰습니다. 보건대란 의료 인력만으로는 부족한 방역 현장을 일반 시민이 자발적으로 보조하는 조직을 말합니다.
- 그랑(Grand): 시청 하급 공무원으로, 화려한 능력 없이도 통계와 기록을 묵묵히 정리하며 현장을 받쳐 주는 인물입니다.
제가 이번에 다시 읽으면서 가장 마음에 걸린 인물은 오히려 코타르(Cottard)였습니다. 그는 봉쇄된 도시의 혼란을 밀거래의 기회로 삼으며, 재난이 자신에게는 일종의 해방감을 준다는 복잡한 심리를 드러냅니다. 이 불편한 인물이 없었다면 소설은 너무 아름다운 이야기로만 끝났을 것입니다. 재난이 모두에게 같은 의미가 아니라는 사실, 그것이 카뮈가 냉정하게 직시한 인간 조건(condition humaine)입니다. 인간 조건이란 인간이 태어나면서부터 피할 수 없이 마주하게 되는 죽음, 고통, 불합리한 현실 전체를 아우르는 개념입니다.
부조리 저항 — 팬데믹을 한 번 치러본 우리가 다시 읽는 의미
제가 직접 겪어보니, 팬데믹이 끝났다고 해서 그 시간이 없던 일이 되지는 않았습니다. 일상이 돌아온 뒤에도 한동안은 마스크를 쓰지 않은 얼굴이 낯설었고, 지하철에서 기침 소리가 들리면 반사적으로 몸을 피했습니다. 소설 속 오랑의 문이 열리는 날, 시민들이 재회의 기쁨에 넘쳐날 때 리외 혼자 아내의 부고를 받는 장면이 오래 마음에 남은 것도 그래서입니다. 해방의 날이 모두에게 같은 날이 아니라는 것을 저도 몸으로 알았기 때문입니다.
카뮈가 이 소설에서 말하는 부조리(absurde)는 단순히 '이상하다'는 뜻이 아닙니다. 부조리란 인간이 아무리 의미를 찾으려 해도 세계가 침묵으로 응답할 때 발생하는 근본적인 불일치를 말합니다. 아무 잘못 없는 아이가 페스트로 고통스럽게 죽어가는 장면에서 리외가 분노하는 이유가 바로 그것입니다. 어떤 신학적 설명도, 어떤 통계적 수치도 그 한 아이의 죽음을 납득 가능하게 만들지 못합니다.
한 차례의 팬데믹을 경험하고 나서 저는 이 소설을 읽는 눈이 달라졌다고 느꼈습니다. 예전에는 '어떻게 저런 헌신이 가능할까' 감탄하는 쪽으로 읽었다면, 이번에는 '저라면 어디까지 할 수 있었을까'를 끊임없이 묻게 되었습니다. 솔직히 말하면, 저는 리외나 타루처럼 될 자신이 없습니다. 제 아이들을 먼저 지키고 싶다는 마음이 그 어떤 대의보다 강하게 앞섰을 것입니다. 그게 잘못된 마음인지 지금도 확신하지 못합니다.
다만 카뮈의 답은 조금 다른 곳에 있는 것 같습니다. 그는 모두가 리외가 되어야 한다고 요구하지 않습니다. 그랑처럼, 자신이 있는 자리에서 할 수 있는 일을 성실하게 이어가는 것. 그것이 부조리한 현실에 맞서는 인간의 가장 현실적인 저항이라고 말하는 것으로 읽혔습니다. 세계보건기구(WHO)도 팬데믹 대응의 핵심으로 '지역 사회 연대와 개인의 사회적 책임'을 일관되게 강조한 바 있습니다. 출처: WHO 코로나19 공식 페이지
저는 과연 세상에 도움이 되는 삶을 살고 있는가. 책을 덮고 나서도 이 질문이 한동안 머리에서 떠나지 않았습니다. 정답은 아직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그 질문을 계속 붙들고 사는 것 자체가 이미 카뮈가 말한 저항의 시작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자주 묻는 질문
Q. 카뮈의 『페스트』는 실제 역사적 사건을 바탕으로 쓴 소설인가요?
A. 직접적인 실화 소설은 아닙니다. 카뮈는 19세기 오랑에서 실제로 발생한 콜레라 유행과 나치 점령하의 프랑스를 동시에 염두에 두고 이 작품을 썼습니다. 소설 속 페스트는 특정 사건을 그대로 옮긴 것이 아니라, 인간이 피할 수 없는 재난과 억압 전반을 상징하는 장치로 사용되었습니다. 그래서 시대와 장소를 불문하고 계속 새롭게 읽히는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Q. 소설에서 파늘루 신부는 왜 페스트를 신의 벌이라고 했나요?
A. 파늘루 신부(Père Paneloux)는 초반에 페스트를 신이 인간의 죄악에 내리는 심판으로 해석합니다. 재난을 의미 있는 것으로 만들고 싶은 인간의 심리가 투영된 태도입니다. 그러나 소설 후반부, 아무 죄 없는 아이가 고통 속에 죽어가는 장면을 목격한 뒤 파늘루는 크게 흔들립니다. 카뮈는 이를 통해 재난 앞에서 쉬운 신학적 해답에 기대는 태도를 정면으로 묻고 있습니다.
Q. 코로나19 이후에 『페스트』를 읽으면 예전과 다르게 느껴지나요?
A. 제 경험상 이건 좀 다릅니다. 팬데믹 이전에는 소설 속 봉쇄와 격리가 다소 과장된 설정처럼 느껴졌습니다. 하지만 직접 2주 격리를 경험하고 나서 읽으니, 오랑 시민들의 답답함과 죄책감이 실감 나게 다가왔습니다. 재난을 몸으로 겪은 독자에게 이 소설은 철학 텍스트가 아니라 일종의 감정 기록으로 읽힙니다.
Q. 리외와 타루 중 누가 더 카뮈의 철학을 대변하는 인물인가요?
A. 두 인물은 각각 다른 방식으로 카뮈의 부조리 철학을 구현합니다. 리외가 직업적 의무와 냉철한 현실 인식으로 저항한다면, 타루는 타인의 고통을 자기 것으로 받아들이는 연민에서 출발합니다. 카뮈 자신은 어느 한 인물에 자신을 완전히 투영하지 않았다고 알려져 있으며, 두 인물의 우정 자체가 연대라는 주제의 핵심을 이룹니다.
결론
뉴스에서 페스트균이라는 단어를 다시 보게 되리라고는 솔직히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그 단어가 화면에 뜨는 순간 저도 모르게 책장을 향해 손이 갔고, 다시 읽은 『페스트』는 처음 읽었을 때와는 전혀 다른 무게로 다가왔습니다.
리외처럼 모든 것을 내려놓을 자신은 없습니다. 제 아이들이 먼저인 소시민적인 마음, 그것이 잘못된 것인지는 여전히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이 소설이 저에게 남긴 것은 영웅이 되라는 압박이 아니었습니다. 두려운 상황에서도 제 자리에서 할 수 있는 가장 성실한 일을 포기하지 않는 것, 그것이 그랑이 보여준 저항의 방식이었고, 지금의 저에게 가장 현실적인 답으로 남아 있습니다.
다음 재난이 언제 올지는 모릅니다. 다만 그때 저는 어떤 사람으로 서 있을지, 이 소설을 덮고 나서도 그 질문만큼은 놓치지 않으려고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