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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변에 유독 눈치 없고 답답하다는 소리를 달고 사는 사람이 한 명쯤 있습니다. 저도 솔직히 그런 사람을 보면 속으로 한숨을 쉬었던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도스토예프스키의 《백치》를 읽고 나서, 그 답답함의 정체가 무엇이었는지를 처음으로 제대로 들여다보게 됐습니다. 타락한 세상에서 한 여인의 비참한 삶의 여정을 진정어린 연민으로 바라보는 그의 순수함이 왜 '백치'가 될 수밖에 없는지, 그 이야기를 꺼내보려 합니다.

미시킨 공작이 '백치'가 된 세상의 배경
소설의 무대인 19세기 페테르부르크는 뒷거래와 부패, 물질만능주의가 숨 쉬듯 당연한 도시입니다. 귀족들은 체면과 이권을 위해 서로를 이용하고, 관계마다 계산이 먼저입니다. 그 한복판에 스위스에서 요양을 마치고 돌아온 미시킨 공작(레프 니콜라에비치 미시킨)이 불쑥 등장합니다.
도스토예프스키는 이 인물을 설계할 때 예수 그리스도에 가장 가까운 '절대적으로 선량한 인간'을 목표로 삼았다고 합니다. 거짓말을 모르고, 이해관계를 따지지 않으며, 상대의 고통에 그냥 반응해버리는 사람. 그런데 제가 직접 읽어보니, 그 순수함이 오히려 주변 사람들을 불편하게 만드는 장면이 계속 반복됩니다.
여기서 핵심 개념인 유로지비(Yurodivy)를 짚고 넘어가야 합니다. 유로지비란 러시아 정교회 전통에서 비롯된 '성스러운 바보'를 뜻하는 개념으로, 세상의 눈에는 미치광이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세속의 허상을 꿰뚫어 보는 영적 지혜를 가진 성자를 가리킵니다. 도스토예프스키는 미시킨을 이 유로지비 전통 위에 세워놓은 것입니다.
그러니까 미시킨이 '백치'로 불리는 건 그가 멍청해서가 아닙니다. 오히려 그가 너무 올곧고 투명하기 때문에, 자신들의 위선이 그의 눈앞에서 저절로 폭로되는 것을 견디지 못한 사람들이 그에게 먼저 낙인을 찍어버린 겁니다. 저는 이 구조를 읽으면서 제 주변의 그 '답답한 사람'이 떠올랐고, 부끄럽게도 저 역시 그를 낙인찍던 사람 중 하나였다는 걸 인정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 페테르부르크: 19세기 러시아 제국의 수도로, 귀족 사회의 부패와 물질만능주의가 집약된 공간
- 유로지비(Yurodivy): 러시아 정교회 전통의 '성스러운 바보'. 세상 눈엔 바보지만 세속의 허상을 꿰뚫는 성자
- 미시킨 공작: 절대적 선을 가진 인물이 타락한 세상과 충돌할 때 어떻게 파멸하는지를 보여주는 도스토예프스키의 문학적 실험
나스타샤 필리포브나, 상처 입은 영혼의 자기 파멸
소설을 읽으면서 제가 가장 오래 멈춰 있었던 인물은 사실 미시킨 공작이 아니라 나스타샤 필리포브나였습니다. 그녀의 이야기는 읽는 내내 마음이 무거웠습니다.
나스타샤는 어린 시절 몰락한 귀족 집안에서 고아가 된 뒤, 부유한 지주인 토츠키의 보호 아래 자랐습니다. '보호'라는 단어가 붙어 있지만 실상은 사실상 그의 정부(情婦)로 길러진 것이었습니다. 어른의 돌봄을 받지 못하고 세상에 내던져진 아이가 어떻게 될 수밖에 없는지를 도스토예프스키는 아주 냉정하게 보여줍니다.
제가 50을 넘긴 나이에도 사회의 무관심 속에서 살아갈 용기를 가지기가 벅찰 때가 있는데, 선택권조차 없이 궁핍과 낙인 속으로 밀려난 어린 나스타샤가 받았을 상처는 감히 가늠조차 하기 어렵습니다. 주변을 돌아봐도 어른의 보호를 제대로 받지 못한 채 세상으로 내몰린 아이들이 적지 않다는 걸 생각하면, 이 소설이 단순한 19세기 이야기로만 읽히지 않습니다.
팜므파탈(Femme Fatale)이라는 표현이 나스타샤에게 종종 붙습니다. 팜므파탈이란 남성을 파멸로 이끄는 치명적인 매력을 가진 여성 캐릭터 유형을 가리키는 문학적 개념입니다. 그런데 저는 그 낙인 역시 세상이 그녀에게 씌운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녀는 스스로 파멸을 선택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은 자신이 미시킨 공작처럼 순수한 존재에게 어울리지 않는다는 자기 부정에서 한 발짝도 벗어나지 못하는 인물입니다.
로고진은 또 다른 극단입니다. 그는 나스타샤를 향한 강박적 소유욕(Obsessive Possession)을 드러냅니다. 소유욕이란 상대의 의사와 무관하게 자신의 것으로 만들고자 하는 집착적 욕망을 가리키는데, 로고진의 사랑이 딱 이것입니다. 그에게 나스타샤는 막대한 유산을 쏟아부어서라도 반드시 손에 넣어야 할 대상이고, 얻었다는 안도와 빼앗길지 모른다는 공포가 동시에 그를 지배합니다. 이 뒤틀린 감정이 결국 소설 전체의 비극을 끌고 갑니다.
도스토예프스키 연구자들은 나스타샤를 가리켜 "사회의 위선이 만들어낸 희생양"이라고 평가합니다(출처: Encyclopaedia Britannica, The Idiot). 그 평가가 틀리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그녀의 파멸은 개인의 나약함이 아니라, 그녀를 그렇게 만든 세상이 선행한 것입니다.
하얀 시트 위의 검은 파리 — 이 소설이 던지는 경고
소설의 마지막 장면을 처음 마주했을 때, 저는 한동안 책을 덮지 못했습니다. 하얀 침대 시트 위에 앉은 검은 파리 한 마리. 그 옆에는 나스타샤의 차가운 몸이 있습니다. 도스토예프스키가 이 장면에 담아낸 것은 단순한 죽음의 묘사가 아닙니다.
하얀 시트는 순결과 순수함을, 검은 파리는 그것을 갉아먹는 세상의 악과 유혹을 상징합니다. 결국 선량한 영혼을 파멸시키는 악은 거창한 형태로 오지 않는다는 것, 그 경고가 이 한 장면 안에 압축되어 있다고 저는 읽었습니다. 삶의 곳곳에 도사린 유혹과 타협의 순간들이 이 검은 파리처럼 아무렇지 않게 앉아 있다는 것.
이볼리트의 '필요 불가결한 해명'이라는 대목도 인상적입니다. 이는 소설 속 죽음을 앞둔 청년 이볼리트가 쓴 일종의 유서 형식의 고백인데, 고통 속에서도 삶의 소중함과 타인을 향한 연민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역설적으로 드러냅니다. 절망의 언어로 쓰였지만 그 안에 삶을 향한 마지막 애착이 담겨 있어, 저는 이 부분을 읽으면서 한참 멈췄습니다.
러시아 문학을 연구하는 학자들은 《백치》를 도스토예프스키의 5대 장편 소설 중 가장 자전적인 색채가 짙은 작품으로 꼽습니다(출처: JSTOR, Dostoevsky Studies). 작가가 자신이 가장 아끼는 인물인 미시킨 공작을 통해 "절대적 선이 현실에 던져질 때 어떻게 되는가"를 실험한 것이라 보면, 이 소설의 결말은 처음부터 예고된 것이었는지도 모릅니다.
제가 이 소설을 읽고 나서 스스로에게 가장 많이 물었던 질문은 이것이었습니다. 나는 내 주변의 순수한 사람을 제대로 보고 있었는가. 남들이 '답답하다', '사회성 없다'고 손가락질할 때 저도 그 무리에 섞여 있었던 건 아닌가. 누구나 돌팔매질하더라도 저만큼은 그 사람을 제대로 볼 수 있는 안목과 혜안을 가져야겠다는 다짐을 이 책이 처음으로 하게 만들었습니다.
자주 묻는 질문
Q. 도스토예프스키 《백치》는 어렵지 않나요? 처음 읽어도 될까요?
A. 솔직히 말씀드리면 쉬운 소설은 아닙니다. 등장인물이 많고 러시아식 이름이 익숙하지 않아서 초반에 헷갈리는 부분이 있습니다. 그런데 제 경험상 낭독 음원이나 영상과 함께 병행하면 훨씬 따라가기 수월했습니다. 인물 관계에 익숙해지면 이후부터는 오히려 손을 놓기 어렵습니다.
Q. 미시킨 공작이 왜 '백치'라고 불리는 건가요?
A. 그가 지능이 부족해서가 아닙니다. 돈과 권력, 계산이 지배하는 세상에서 아무런 이해관계 없이 투명하게 행동하는 인물이기 때문에, 주변 사람들이 자신들의 위선이 들킬 것을 두려워하며 그에게 '백치'라는 낙인을 먼저 찍어버린 겁니다. 너무 올곧아서 오히려 비정상 취급을 받는 역설입니다.
Q. 나스타샤 필리포브나는 왜 미시킨 공작의 사랑을 받아들이지 못하나요?
A. 이게 소설에서 가장 안타까운 지점입니다. 나스타샤는 어린 시절부터 사회적 낙인을 너무 깊이 내면화한 나머지, 자신이 미시킨처럼 순수한 사람 곁에 있으면 그를 파멸시킬 것이라 믿습니다. 사랑받을 자격이 없다는 자기 부정이 그녀를 계속 파멸 쪽으로 밀어냅니다. 읽으면서 가장 가슴이 아팠던 부분이었습니다.
Q. 유로지비가 뭔가요? 미시킨 공작이랑 어떤 관련이 있나요?
A. 유로지비(Yurodivy)는 러시아 정교회 전통의 '성스러운 바보'를 가리키는 개념으로, 세상 사람 눈에는 미치광이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세속의 허상을 꿰뚫어 보는 성자를 뜻합니다. 도스토예프스키는 미시킨을 이 전통 위에 의도적으로 설계했습니다. 그가 '바보 같다'는 소리를 듣는 것 자체가 오히려 그의 영적 순수함을 증명하는 아이러니입니다.
결론
《백치》를 다 읽고 나서 저는 나스타샤와 미시킨공작을 생각하며 한동안 앉아 있었습니다. 인간이 인간을 구원할 수 없는 세상, 가장 선량한 존재가 가장 먼저 파멸하는 세상을 도스토예프스키는 아름답고도 처절하게 기록했습니다. 그가 그려내려 했던 메세시가 무엇이었을까 가만히 눈을 감고 생각에 잠겨보았습니다. 그 아픔을 그대로 마음에 품은 채 세상을 떠나야 했던 그녀에게 ' 너의 잘못이 아니야. ' 라고 말할 수 있는 이는 바로 미시킨 공작 단 한 사람이었습니다. 나의 아픔을 알아봐 준 한 사람이 있었다는 것 만으로 이미 나스타샤는 이제 죽어도 여한이 없다는 생각을 하지 않았을까요. 그녀의 마음을 고스란히 내 맘에 담은 채 이제 내게 남은 세상에도 그 위로를 전해 주는 사람이어야겠다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그 위로가 150년 전 페테르부르크에만 있는 게 아니라는 생각이 내내 마음속을 맴돌고 있으니까요.
제가 이 소설에서 가지고 나온 또 하나의 생각이 있습니다. 남들이 다 손가락질할 때도 그 사람을 제대로 볼 수 있는 눈을 가지고 싶다는 것. 사소한 매일의 선택 하나하나가 하얀 시트 위에 파리를 앉히는 일일 수도, 반대로 쫓아내는 일일 수도 있다는 것. 아직 읽지 않으셨다면 낭독 영상부터 시작해보시길 권합니다. 생각보다 훨씬 깊이 들어옵니다.